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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년 메이저리그의 유일한 기록, 한만두

아이라이대 2022. 4. 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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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확률과 데이터의 스포츠다. 특히 축구나 농구와 달리, 9이닝 동안 각 팀이 수비와 공격을 번갈아하는 다소 독특한(?) 시스템은 이런 확률적 재미를 더욱 더 심도깊게 만들어준다. 그러다보니 각종 기록들에 고유의 타이틀이 붙곤 하는데, 예를 들어 한 투수가 9이닝 동안 홀로 오롯이 상대팀을 0점으로 틀어막을 경우엔 완봉승,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안타까지 맞지 않을 경우 노 히트 노 런(No Hit No Run/ No-Hitter)라고 불린다. 즉, 같은 기록이어도 확률이 더 낮은 상황이 나올 경우, 새로운 타이틀과 의미를 가지는게 야구란 스포츠다.

이런 다양한 룰과 타이틀, 확률적 재미는 야구를 "아는 사람에게만 재밌는 스포츠"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야구는 한번 빠지면 그 특유의 맛에 중독되지만, 복잡한 규칙과 데이터(타율, 방어율, 더 나아가선 세이버 메트릭스) 때문에 입문하기 어려운 스포츠기도 하다. 일례로, NBA는 규칙을 잘 몰라도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와 중계 덕에 초심자도 즐기기가 훨씬 쉬운 편이다. 반면 야구는 긴장감은 있지만, 다른 스포츠 대비 역동적인 맛은 조금 덜한 편이다.

 

서론이 다소 길었던 이유는, 140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다시는 안나올 사건으로 평가되는 "한만두(한이닝 만루홈런 두방)",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한한만두(한 이닝에 한 투수가 한 타자에게 만루 홈런을 두방 맞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야구에서 가장 짜릿하게 점수를 내는 방법은 바로 홈런(Home Run)이다. 타자가 펜스 너머로 공을 넘기면, 진루해있는 모든 주자가 귀루하여 스코어로 인정된다. 특히, 1~3루까지 모든 루상에 주자가 차있다면, 홈런 한방에 진루한 주자 3명, 타자 본인까지 포함해 총 4점의 점수가 나게 된다. 타격 한방에 큰 점수가 날 수 있다보니, 이 "만루 홈런"은 승부를 뒤집는 가장 강력한 카드로 생각되기도 한다.

 

아무리 홈런 능력이 출중한 타자여도, 소위 말하는 "밥상"이 차려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록이 만루홈런이기도 하다. 50%의 확률로 홈런을 때릴 수 있는 타자가 팀에 존재해도, 그 타자 전에 루상에 주자들이 진루하지 못하면 만루홈런은 나올 수 없다. 말 그대로 팀 전체가 컨디션이 좋고, 상대 투수의 볼넷 같은 흐름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나올 수 있는게 만루홈런이란 이야기다.

직관적인 예시를 들자면, 국내 프로야구에서 15년간 총 467개의 홈런을 친 이승엽도 커리어동안 만루홈런은 10개밖에 못쳤다. KBO에서 가장 많은 만루홈런을 친 이범호가 17개정도니, 이정도면 만루홈런을 친다는것 자체가 어느정도 야구 신의 축복이 있어야 하는것 같기도 하다.

1200만분의 1의 확률, 한만두(한 이닝 만루홈런 두개)

이렇게 나오기 어려운 만루홈런을 한 이닝에 한 타자가 두번 치는게 가능할까? 일본 야구만화에서나 가능할법한 이 시나리오는, 놀랍게도 1999년 4월 23일에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기록의 주인공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페르난도 타티스(Fernando Tatis Sr.)는 커리어 전체적으론 그닥 두각을 나타낸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음에도 메이저리그 역사에 영원히 기억남는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야구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겠지만, 이 영광스러운 대기록엔 코리안특급 박찬호도 함께 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소속이었던 박찬호는, 타티스가 한 이닝에 두개의 만루홈런을 칠 당시 투수였다. 홈런은 타자의 기록이긴 하지만, 박찬호는 여러 상황과 맞물렸던 "한한한만두"의 공을 던진 죄(?)로 영원히 메이저리그 역사에 함께 하게 되었다.

유명 야구사이트인 MLB닷컴 분석에 따르면, 한 이닝에 한 타자가 한 투수에게 두개의 만루홈런을 칠 확률은 1200만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한다. 국내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814만분의 1인걸 생각하면 정말 말도안되는 극악의 확률이다. 심지어 이 분석에서 구한건 한 타자가 한 이닝에 두개의 만루 홈런을 칠 확률이니, 여기에 "한 투수"라는 전제조건이 붙으면 확률은 더더욱 극악으로 치닫게 된다.

1200만분의 1이라는 확률이 사실 엄청 정확한건 아니다. 다양한 타율의 타자가 홈런을 칠 확률, 만루 상황이 만들어질 확률 등 여러가지 확률을 종합하여 상황을 만든 확률이 저정도인것이라, 사실 정확히 99년 당시 경기의 상황을 종합하면 확률은 살짝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냥 그만큼 말도 안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란 점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나?

1999년 당시 박찬호는 상당히 촉망받던 유망주 중 한명이었다. 한만두가 발생한 3회 전까지의 상황을 보면, 2회까지 박찬호가 속한 LA다저스가 2:0으로 앞서있는 상황이었다. 박찬호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기에, 페르난도 타티스가 첫 만루홈런을 때린 후 다저스는 투수를 교체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홈런 이후에 상황이 지독하게 박찬호에게 나쁘게 흘러갔다는 점이다.

만루 홈런을 맞은 후, 박찬호는 침착하게 땅볼로 1아웃을 잡아냈다. 하지만 바로 솔로홈런을 맞고 제구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송구 에러, 볼넷, 몸에 맞는 공 등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안좋은 상황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송구 에러로 인한 판정에 항의하던 다저스의 데이비 존슨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하다가 퇴장까지 당했다.

 

감독의 퇴장이란 큰 변수를 맞이한 다저스는, 멘탈이 부서질대로 부서진 박찬호를 교체하지 않았다. 마침 어찌저찌 투아웃까지 잡아낸 상황이었기에, 박찬호가 어떻게든 위기를 넘기길 기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타순이 돌아온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박찬호는 만루홈런을 맞으며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페르난도 타티스가 이 경기에 쓴 헬멧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아직도 보관되어있다. 그가 뛰어난 성적을 거둔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던걸 고려하면, 이 사건이 얼마나 야구 역사에 큰 의미를 줬는지 대략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기로 평생 고통받던 박찬호는 LA다저스에서 승승장구하며, 한국 야구 역사에 길이남을 스타플레이어가 된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지난 4월 23일은 이 전설의 한만두 사건이 일어난지 24년이 된 날이었다. 여느때처럼 트위터를 비롯한 각종 SNS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한만두 사건을 보며, 나 역시 한번 그 순간을 정리하고 기록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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