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확실히 트렌드를 따라가기 벅차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얕고 넓게 많이 안다"가 나의 지식 모티브였는데, 확실히 요즘은 그것도 쉽지 않다. 그냥 얕고 좁게가 되어가는 느낌.
그리고 이걸 확실히 느끼게된게, 요즘 각종 숏폼에서 챌린지로 핫한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수염의 아내>라는 노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목을 알게된 후 부터다.
강렬한 비트와 중독성 넘치는 후렴구, 확실히 요즘 인기있는 노래는 귓가에 맴도는 후킹 포인트가 제대로 살아있다. 요즘 아이돌, 특히 여자아이돌 신곡들이 이런 포인트들을 잘 살리는듯 하다. 인스타 릴스나 틱톡을 통해 바이럴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더욱 마케팅 포인트로 이런 곡들을 잘 발굴해 내는듯.
여하튼, 30대 남자가 듣기에도 귀에 쏙쏙 박히는 르세라핌의 신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도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그룹의 정체성이 담긴 노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르세라핌(LE SSERAFIM)이란 그룹명은 "두려워하지 않는다(I'm Fearless)"라는 문장을 애너그램으로 만든 이름이다. 구약 성경에서 천사가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했던것에서 착안하였다는데... 확실히 아이돌 기획사들은 이런 전체적인 세계관과 스토리텔링을 상당히 잘 하는듯 하다.
구약성경과 두려워하지 않는다(Fearless)에서 모티브를 얻은 아이돌 그룹답게, 르세라핌은 강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노래와 파워풀한 안무로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라는 곡에는 르세라핌의 그룹 세계관과 정체성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노래가 그린 여성 3인의 공통점은?
그렇다면, 도대체 이브와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도대체 어떤 인물들인걸까? 각각 구약성경, 그리스 신화, 그리고 프랑스 동화 속에서 유래된 세 여성은, 모두 "금기를 깼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프로듀서가 아닌지라 아주 정확하진 않을 수 있지만,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여성상을 춤과 노래로 표현하는 르세라핌의 방향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역사와 신화 속 인물이 아닐까 싶다. 뭐 여하튼, 세 여성상을 각각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브: 금지된 선악과를 먹은 인류 최초의 여성
르세라핌의 노래 제목에 등장하는 세 여성 중 가장 유명한 이브(Eve)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자 신(여호와)가 금기시한 일을 저지른(?) 인물이다. 바로 욕망의 근원이라 여겨지는 "선악과"를 먹은 일인데, 성경에선 이때문에 인간이 이상적인 평화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이브에 대해선 워낙 파생된 이야기나 노래가 많은지라 개인적 사견을 덧붙히진 않으려 한다. 하지만 확실한건, 이브를 제목에 포함함으로서 르세라핌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거침없는 이미지에 대한 의지를 명확히 보여준듯 하다.
프시케(Psyche),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어버린 여인
프시케는 그리스 신화 속 마음과 영혼의 여신이다. 정신이란 뜻을 담은 접두사 Psych-의 직접 어원이기도 한 그녀는, 마음과 영혼의 여신이란 수식어에 맞지 않게 기구한 이야기를 가진 신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사게되어 아름다운 외모에도 사랑을 받지 못하던 프시케는, "절대 자신의 얼굴을 궁금해하지 말라"라던 남편(에로스)의 조언을 무시하였다가 크나큰 고난을 받게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승으로 떠나 절대 열어선 안되는 페르세포네의 화장품이 담긴 "미의 상자"를 열어보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여인이다.
프시케는 이 후, 신들의 왕 제우스와 남편 에로스의 노력으로 결국 아프로디테와 극적인 평화협정(?)을 이뤄내고 마음과 영혼의 여신으로 거듭난다. 신의 금기를 깬 인간의 삶이 대체로 결말까지 불행했던걸 고려하면, 프시케는 기구한 과정은 있었지만 해피엔딩을 맞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푸른 수염의 아내: 가장 생소할, 하지만 가장 잔혹한 스토리의 주인공
마지막으론 푸른 수염의 아내다. <푸른 수염>은 프랑스 아동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샤를 페로의 동화인데, 동화치곤 섬뜩한 "의처증"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귀족 푸른수염의 남자에겐 뭔가 수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결혼만 하면 아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는 수 십번 결혼하였으나, 항상 얼마가지 않아 아내들이 실종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딸부자집의 막내딸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한가지 조건을 내걸게 되는데... 바로 "지하실 한 구석에 있는 방 문은 절대 열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예상하다시피, 푸른수염의 아내는 지하실 한 구석의 방문을 기어코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동안 푸른수염이 결혼했던 아내들의 시체들이 가득했다-라는 스토리다. 푸른수염은 아내들을 항상 의심했고, 그래서 자신이 내건 단 한가지의 조건인 "지하실 방 문을 열지 말라"를 어기면 바로 살해한 것이었다.
푸른수염의 아내는 다행히 기도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자신의 오빠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프시케와 마찬가지로 잔혹하긴 하지만 나름 해피엔딩(?)인 셈.
결론, 금기를 어겼지만 이를 이겨낸 여인들의 이야기
세 여인상의 공통점은 금기된 무언가를 어기고, 이를 극복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 있다. 이브는 살짝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프시케는 금기를 어기고 우여곡절 끝에 여신이 되었고 푸른수염의 아내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잘 살아갔다.
이정도면 겁 없이 개척해나가는 세계관을 이어가는 르세라핌의 테마를 나름 함축적으로 잘 담아낸 무려 15글자의 노래 제목이 아닌가 싶다. 중독성 강한 노래를 듣고 제목이 궁금해서 급 써내려간 블로그 포스팅이라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모르겠다. 노래나 다시 들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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